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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72년을 한결같이…국내 자전거 산업의 산역사 '삼천리자전거'

등록일 :2017-07-19



-1944년 12월 (대한민국 최초 자전거 회사 '경성정공' 창업)

-1952년 4월 (국내 최초 완성 자전거 '3000리호' 생산)

-1987년 12월 (국내 최초 연간 100만대 자전거 생산가능 능력 돌파)

-1965년 (국내 최초 자전거 해외 수출)

-2007년 12월 (국내 최초 연간 자전거 100만대 판매 돌파)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힘을 얻어 보다 빨리가기 위해 고안된 인간 정신의 창조물.' 스페인 출신 철학자 가세트가 내린 자전거 정의다.

송성수 부산대 교수가 쓴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에 따르면 지구에 존재하는 이동 수단 중 가장 효율적인 기구로 평가받는 자전거의 시초는 1971년 프랑스 귀족 시브락이 만든 '셀레리페르(Celerifere)'다. 핸들이나 페달 없이 두 바퀴를 연결하고 안장만 있던 이 자전거는 1817년 독일 귀족 드라이스(Karl von Drais)에 의해 핸들이 설치됐다. 이어 1839년 스코틀랜드 대장장이 맥릴런(Kirkpatrick MacMillan)이 페달을 달았다. 대량생산을 통해 판매가 시작된 자전거는 1861년 프랑스 대장장이 미쇼(Pierre Michaux)가 만든 '벨로시페드(Velocipede)'가 원조다. 타이어 바퀴는 1887년 스코틀랜드 수의사 던롭(John B. Dunlop)이 고안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자전거가 들어왔을까. 1883년 또는 1895년 윤치호(尹致昊)가 미국에서 처음 자전거를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1890년대 인력거와 함께 일본에서 들어왔다는 설도 있고, 1900년대 초 자동차와 함께 들어왔다는 설도 있다.

국내 자전거에 대한 첫 기록은 조선에 선교사로 들어왔던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 한국명 안연(安連))이 1884년부터 1905년까지 국내에서 활동했던 내용을 모아 1908년 펴낸 책 '조선견문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견문기에서 알렌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자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에 조선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고, 구경꾼들의 요청에 못 이겨 길을 여러 번 오고 가고 해야 했다”며 “조선 사람들은 선교사들을 '나리'라고 부르며 최고의 대우를 했다”고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월간잡지 '별건곤 제12호(1928년 12월 1일 발행)'를 보면 '각계 각면 제일 먼저 한 사람'이라는 글 속에는 “(1985년 망명지 미국에서 돌아 온) 서재필씨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자전차를 타고 다녔는데 차력(車力)으로 남대문을 훌훌 뛰어넘어 다녔으며 자전차 종이 한번 울리면 대포 소리로 여겨 모두 겁을 내고 도망쳤다”라는 글도 있어 도입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자행거(自行車)·안경차(眼鏡車)·축지차(縮地車)·쌍륜거(雙輪車)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던 '자전거'는 1903년 가을 정부에서 관리들의 공무수행을 위해 100대를 도입한 이후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1920년대 들어 국내 신문 광고를 통해 자전거 판매를 알리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1920년 4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미국산 멕쓰코자전거를 들여왔다는 덕창자전거상회(대표 신덕현)의 자전거 판매 광고가 게재됐다.

1921년 신문에선 평양이나 논산, 이리 등에서 별도의 자전거대회가 열렸고, 각종 체육대회에서도 자전거 경주가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가 자주 등장했다.

특히 논산자전차운동회 경기 결과를 알린 1921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엄복동 선수가 등장한다. 이 행사에서 엄 선수가 2등을 해 60원 가치의 금시계를 받았다.
자전거 판매상인 일미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엄복동은 1913년 4월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와 매일신보사(每日申報社)가 인천(12일)·용산(13일)·평양(27일) 등에서 공동 주최한 전조선자전차경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자전거경주 1인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2018년 개봉을 목표로 월드스타 비(분명 정지훈)를 비롯해 이범수와 강소라, 민효린 등 호화배역이 포진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이 현재 제작되고 있다. 그의 일생은 국권 상실의 암울한 시대, 자전거 경기를 통해 일본인들을 눌러 민족적 일체감과 자긍심을 심어준 '국민적 영웅'으로 재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1940년대 이전까지 이미 많은 자전거가 국내에 보급됐지만 대부분 수입품이거나 기본 제품의 형태를 본떠 만든 조립식에 불과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체적으로 자전거를 생산한 해는 7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故 학산 김철호 사장이 1944년 12월 설립한 '경성정공(현 기아자동차)'이 국내 최초 자전거 회사이다. 이 업체는 해방 직후 팽창하는 인구와 부족한 교통수단 탓에 자전거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우선 각종 부품의 분해 재생부터 차체, 림, 스포크, 브레이크 등 주요부품을 생산하며 완전 국산화와 완성 자전거의 생산 기틀을 마련했다.

1952년 경성정공은 '기아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대한민국 최초 국산 완성차 자전거를 선보였다.

시대적 배경을 반영해 통일 염원을 내포한 '삼천리'가 좋겠다는 의견이 채택돼 최초의 국산 자전거에는 '3000리호'라는 이름이 붙게 된다. 시작품 12대로 시작된 3000리호는 국내 기계 산업 부흥에 이바지하고 국민들의 대중교통 수단이자 소화물 운송수단으로 오랫동안 사랑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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